구원에 대한 확신(벧후1:10)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를 부르셨고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과 일부입니다. 그것이 신약성경 서신에서는 어디에서나 깨달을 수 있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활한 거짓 겸손을 경계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큰 겸손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근심과 어려움과 고난에도, 기쁨과 방해받지 않은 평화로움으로 조용히 머물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그 누군가를 보게 되면,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확신이 있는 자는 사람을 끄는 것입니다.   믿고,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입니다. 행하고 실천하라. 곧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할 때,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것입니다.)

 

David Martyn Lloyd-Jones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1:10)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가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격려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두 가지 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주어진 면,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절부터 7절까지는, 그것에 비추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역할을 다하기를 그리고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하기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8절부터 살펴보려 하는데, 어떤 점에서는 8절 처음부터 11절 끝까지 에서는 간단하게 이 권고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번의 설교로는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흥미 있는 반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부분으로 분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5절부터 7절까지에서 이미 해왔던 똑같은 호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10절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가 왜 그것에 응답해야 하는가를 보이고자 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베드로가 우리의 믿음에 지식과 절제와 인내를 공급하라고 강권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외부에서 생겨나는 문제로 인하여 우리들이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부의 이단과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합니다. 사도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에 지식 등을 충분히 공급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 이 논지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식으로 그 권고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사실, 10절 말씀은 전 서신의 중심절이며, 전 서신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권고로서 무엇을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까? 표면상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도록 한다는 자기 모순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이때 이 권고는 그것을 단지 그들과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실들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사도가 열거한 이러한 것들을 행하면, 그 결과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해석은 우리가 잠시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의 교리, 그리고 특히 신약성경의 말씀을 완전히 반박하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궁극적이고 영원한 의미에서 확인하기를 권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택하심과 부르심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이미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셨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생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서 받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얻은 것이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사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는 이것, 곧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아둡시다. 베드로는 3절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선물로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다시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 어떤 사람도 그 자신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 점이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의 중심이 되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우리에게 자신을 택하여 스스로 부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택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고백합시다.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붙잡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은 결코 그것을 생각하지도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사람도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란 말은 단지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교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신앙의 실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동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는 일이야말로 기독교의 설교자의 주된 임무입니다. , 그 자신과 자기의 생활과 경험을 살펴보고서 지금 이 순간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경험을 뒤돌아보면서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식하며 승인하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신약성경의 교훈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비웃고 이것을 경멸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차이와 틈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왜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저 수많은 무분별한 사람과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신다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대답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하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권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권고는 "이 일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 큰 약속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의 말처럼 그 사실을 알고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일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를 부르셨고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베드로는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 요한은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바는 전통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이런 방법으로 본문 말씀의 의미를 정의해 보았으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또 다른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누가 이 확신을 해야 합니까? 또 누구를 위하여 이 확신이 예비되어 있습니까? 여기에서 또다시 많은 혼란이 생깁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특수한 소수, 다시 말해서 뛰어난 사람만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은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했지만 분명히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또다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들에게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대부분이 노예였으며 능력이나 교양에 있어서 조금도 예외가 없이 평범한 사람들인 그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구별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직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알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사를 고찰한다면, 부흥과 개혁의 때는 언제든지 교회가 정말로 살아 있었으며 그리고 이 때의 교회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인들이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믿는 자를 아는 것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의 유명한 복음주의 운동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이며 목사인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웨일즈의 감리교도 중의 한 사람인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를 카아디프에서 만났을 때, 하웰 해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해리스씨, 당신은 당신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을 알고 있으며 확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웰 해리스는 여러 해 동안 그 지식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었다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죄의 사함에 대한 지식, 신의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는 지식,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조지 휫필드가 하웰 해리스에게 물었던, 당신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라는 바로 그 질문을 우리 각자에게 해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요한이 요한일서 5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기록하였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바로 이것이 그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확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명하게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점에 있어서 사람들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권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 또는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에 관하여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까요? 구원의 확신을 입심 좋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전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고 솔직하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듯, 입심 좋게, 그렇듯 피상적으로, 그리고 신약성경의 정신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구원의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리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을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그들이 보배로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격적인 그들의 말속에는 경솔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은 신약성경의 교리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언어는 입심 좋게 떠들어대지도, 경솔하지도, 피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는 웃음이나 농담도 없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잘 다듬어진 교활함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 안에서는 이들 중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안에서의 기쁨이란 여전히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갖는 기쁨입니다.

신약성경에서의 기쁨이란 여전히 자기 안에는 부패함이 있다고 깨달은 사람, 그리고 현재의 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은 사람이 갖는 기쁨입니다.

신약성경 안의 사람은 그가 경건함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도록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추구하면 할수록 떠들어대지 않고 피상적으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보다 더 분명하게 알아둡시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이 같은 세상과 생활 가운데에서 나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말하자면, 만일 내가 나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합니다. 그 대답을 신약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주제넘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복음과 그 큰 구원의 영광과 경이 그리고 그것의 놀라운 구원을 격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완전해져야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갖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여전히 죄를 범하면서 그리고 내가 여전히 내 안에 부패함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내가 믿는 자임을 안다. 그리고 나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죄 없는 완전함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장할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교리적 혼란이 있습니다. 죄 없이 완전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 죄 없이 완전해져야 된다는 생각은 신약 성경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장해야 하며, 어떤 여건에서도 그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주장할 수 있도록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교리는 우리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품, 곧 새 것과 옛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그리고 옛 것은 계속해서 새 것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이 있는 곳과 동시에 영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반론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실제적인 문제를 검토해 봅시다. 왜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까? 분명히, 이때에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왜 우리가 이 확신을 가져야만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몇 가지 대답을 제시해 봅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것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과 일부입니다. 그것이 신약성경 서신에서는 어디에서나 깨달을 수 있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모든 서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이 확신을 주려는 것이며 그들에게 이 확신에 대한 지식을 주려는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겸손하고 고상한 채 하기 위하여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렇듯 비참한 죄인인 내가 그러한 의기양양한 주장을 하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진 권리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사실 그것은 거짓 겸손이며, 겸손을 가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합니다. 또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나는 그것을 가지려 하노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람을 겸손함이 부족하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또한 "나는 모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부르심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리고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나 나는 이미 나의 구원을 확신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권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활한 거짓 겸손을 경계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큰 겸손입니다. 우리가 좀더 살펴보면, 교회나 세상이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가장 겸손한 자란 그들의 구원을 확신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더 많이 확신하게 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더욱 더 겸손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신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리고 잘 성숙하지 못한, 완전히 자라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구원을 기뻐하는 자입니다. 만일 우리가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불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모두 영적 기형아입니다. 만일 확신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오히려 마가복음 8장에 묘사되어 있는 주님에게 다가오는 소경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먼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시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시력이었습니다. , 그것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때까지 계속해서 그를 고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확신이 부족하면, 그는 불완전하게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정말로 마땅히 나타내야할 구원을 명백히 증명하지 못합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더욱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 확신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보다 더 훌륭한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구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한 가장 좋은 일꾼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위치를 가장 분명하게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의 구원과 그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가 복음을 전파하며 권고할 수 있겠습니까? 의혹과 공포와 불확신이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야말로 우리의 증언을 가장 불완전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교회사를 뒤돌아볼 때, 죠지 휫필드 같은 사람, 그리고 크게 쓰임을 받던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선언문에서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도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는 복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그렇게 자신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다음 어느 날인가 죽음이나 불화나 전쟁이나 어려운 일이나 환란이 따르게 됩니다. 이 일들이 그들을 혼란시키고, 그들은 어디에서 되돌아서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와 똑같은 상황에서, 겉으로 나타난 근심과 어려움과 고난에도, 기쁨과 방해받지 않은 평화로움으로 조용히 머물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그 누군가를 보게 되면,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확신이 있는 자는 사람을 끄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의 처지와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매력 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끄는 사람은 확신과 권위를 발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이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더 확신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며, 그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로, 지나치게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요컨대 어떤 사람들은 전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위험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기 성찰을 하여 병적으로 되어버립니다. 이들은 자기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면서 인생을 낭비해 버립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렇게 그들 자신을 살펴보는데 관심을 갖게 되어 그 밖의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다음에 또한 일종의 대단한 체험 또는 일종의 환상이나 특별한 증거를 기다리는 위험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일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확신을 얻는 방법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객관적인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불확실하다면, 만일 우리가 불행하다면,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죄와 어둠 외에 어떤 것도 불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확신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봅시다. 객관적으로 생각합시다.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절망이나 죄에서 벗어나 그를 향해 눈을 돌립시다. 그는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흠없는 자가 아니라 죄지은 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와 함께 출발하며 객관적으로 생각합시다.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을 충만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 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 여러 가지 것을 공급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성경의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일에만 머물지 말며 나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위하여 더 많이 일을 할수록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후에 많은 행동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 등을 공급합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확신하는 방법입니다. 이 일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행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더 많이 실천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께 대하여 더 많이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항상 상기시킨다면,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믿음이 충만케 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한다면,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친히 증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동적으로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합시다.

 

우리의 믿음을 더하고,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이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면 낼수록 우리는 더 많이 그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가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점점 더 힘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믿고,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입니다. 행하고 실천하라. 곧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할 때,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충족하게 될 때에 우리 모두가 두려움 없이 확신을 가지고서 죠지 휫필드의 질문에 임할 수 있게 될 것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이며, 이것이 그 질문에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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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하나님의 약속(히12:27-29) - David Martyn Lloyd-Jones [3] 서성필 2012.11.23 2897
27 ★불신의 장애물(창26:17-18) - David Martyn Lloyd-Jones [11] 서성필 2012.11.23 2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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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하나님의 개입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2866
23 믿음을 위하여 싸움 - Robert Haldane 서성필 2012.11.23 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