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불합리성 (5:17-32)

 

마틴 로이드 존스.

 

17 ○대제사장과 그의 지지자들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모두 시기심이 가득 차서 들고일어나,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밤에 주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남김없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21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에 대제사장이 그의 지지자들과 더불어 와서, 의회와 이스라엘 사람의 원로들을 다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서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원들이 감옥에 가서 보니, 사도들이 감옥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23 "감옥 문은 아주 단단히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는데, 문을 열어 보았더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대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서, 대체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고, 사도들의 일로 당황하였다.

25 그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일렀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옥에 가둔 그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래서 경비대장이 경비원들과 같이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봐 두려워서, 폭력은 쓰지 않았다.

27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거늘,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으니,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의 하나님은, 그대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31 이분을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쪽에 높이 올리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사도행전 5장은 놀라운 장입니다 이 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심판을 받아 죽는 경악할 만한 사건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뒤이어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이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 부분은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다 ‥‥‥ 심지어는 병든 사람들을 거리로 메고 나가서, 침상이나 깔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랐다.  또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 많은 사람이, 병든 사람들과 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5:12,15-16).

우리가 오늘 살펴볼 사건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5:17). 이것은 초대교회의 삶을 보여주는 추가적인 일화로서, 다른 사건들을 살펴본 이유와 같은 이유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이며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은 교회의 기원을 신빙성 있게 말해 주는 이 책, 사도행전에만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사실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없었다면 교회는 결코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간파했듯이, 그것 말고는 교회가 생겨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당국자들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바대로 사도들은 "학문 없는 범인"이었습니다( 4:13). 그들은 이 점에 놀랐고,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놀랄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교회가 생겨나더니,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면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일들과 지금까지 수세기의 역사에 기록되어 온 놀라운 일들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일정한 사건들 - 복음서와 사도행전 앞장에 나오는 사건들 - 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참으로 알고 싶다면 사도행전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중대한 기본원리를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의 삶도 마땅히 그 원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 진리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교회는 기독교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의 기관일 뿐입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기독교적인 교회로 자처하는 곳도 있습니다만, 여기 제시된 원리를 따르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내세울 권리가 없습니다.

 

현재 많은 이들이 직면한 큰 문제는, 교회의 실체에 대해 교회 내부적으로 혼동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는 더 더욱 혼동을 겪고 있다는 점입니다. 곤경에 빠진 자들은 교회를 향해 "당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대답은 듣지 못합니다. 초대교회 시대로 되돌아가 그 역사를 살피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기독교, 여기 나오는 기독교만이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시종일관 놀라움을 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번에 다룰 사건은 확실히 우리를 경악케 합니다. 여기에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십시오."[그때에]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그때에"는 앞서 기록된 사건들이 일어난 직후라는 뜻입니다. 그 사건들이 무엇입니까? ,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에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급작스런 죽음이라는 극적이고도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을 방금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 진귀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 주변 지역과 지방에 사는 이들도 아픈 친구와 친척들을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마음이 시기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식으로 반응한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건들을 보고 들은 백성들이 두려움을 느낀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져 죽더니, 세 시간 후에 그 아내도 똑같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목격하면 겁을 먹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11).

 

우리는 백성들이 사도들을 "칭송"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5:13). 물론 예루살렘 사람들이 뭐든지 잘 믿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고, 심지어 약간은 미신적인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처럼 어떤 부부가 심판을 받아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들 눈앞에서 기이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놀라는 것이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그들은 경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이런 능력을 보인 이들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일을 보고서도 분노로 반응하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산헤드린은 사도들을 체포해서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저는 바로 이 현상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은 아주 정직한 기록으로서, 어느 한 면이 아닌 전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두 사람과 관련된 진실을 전부 전해 줍니다. 큰 기업이나 광고 대행업자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전략은 자신들의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이 세제는 흰 옷을 더 새하얗게 만들어 준다"는 식으로 선전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공뿐 아니라 실패의 이야기도, 지지뿐 아니라 반대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신앙에 대한 놀라운 그림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앙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켜야겠습니다. 신앙을 이해하는 일만큼이나 불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요소는 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첫번째 요소는 보이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일단 그런 두려움이 생기고 나면 복음 메시지를 들을 마음과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며 순종할 마음까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신앙의 두번째 요소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시킴으로써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반응이 아닌 심오한 변화를 겪게 만듭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의 해부라고 할 만한 일을 했다면, 이제는 불신앙을 해부할 차례입니다. 불신앙을 이해하는 일은 신앙을 이해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불신앙의 특징을 깨달은 후에 신앙을 갖는 사람들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우며 어리석고 무모한 것인지 깨달을 때, 사람들은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으로 돌아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지 않고 부정적인 모습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눈과 지각을 열어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믿게 하려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정적인 모습도 보여주시는 데 당연히 크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종종 말씀드렸듯이 , 우리는 늘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남의 부정적인 모습에서 더 쉽게 요점이나 원리를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하며 호의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탓에 참 모습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이 자기와 똑같은 결함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금방 알아차립니다. 다윗과 나단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삼하 12). 나단이 다윗에게 그러했듯이, 복음도 우리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진실을 깨우쳐 줍니다(삼하 12:7). 성경 각 장에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건과 실례들이 귀중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월이 흘러도 신앙의 본질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불신앙의 본질 또한 변하지 않았다는 중대한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뭘 하려는지 알겠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불신앙을 보여줄 작정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1900년도 넘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우리는 20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이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불신앙은 언제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은 1세기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불신앙에 무언가 새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의 오류 중에 가장 근거가 빈약하고 딱한 오류입니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에게 왜 믿지 않는지 물어 보십시오. 거의 틀림없이 자신이 '20세기 사람'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옛날 사람들은 뭘 더 몰랐기 때문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덥석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었지만 20세기 사람인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저는 1세기 사람들도 똑같이 복음을 거부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은 2천 년 전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의 사후에 제자들을 미워하고 거부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동일하고, 믿음과 신앙도 동일하고, 불신앙도 동일합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행태를 분석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 간단한 진리는, 오늘날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모든 사람, 복음에 등돌리고 있는 모든 사람, 복음을 싫어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얻게 되는 진리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불신앙의 본질로서, 이것이 언제나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은 왜 믿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 심오한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랑들은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우리는 저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라고외치며 주님을 거부했듯이 사도들도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신앙의 본질 내지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부정적인답변으로서, 불신앙은 지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현재 종교를 비웃는 사람들 -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지면에서 그들의 글을 접합니다. - 이 의기양양하게 내세우는 주장이 바로 '우리는 지적인 이유로 기독교를 거부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능과 지각과 추론 능력을 갖춘 사람들로 자처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관점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특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학적인 관점이야말로 차분하고 공정하며 냉정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편견은 종교인들의 표지인 데 반해, 과학자들은 선입견이 없으며 사실을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자기 앞에 주어진 견해들을 마치 신처럼 냉철하게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객관적으로 검토한 결과 기독교가 참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기도 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한 남자가 "저도 믿을 수 있기를 바랐지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지 않으며,그것이 그의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오해에 있습니다.

그는 "믿을 수 있기를 바랐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지성인이어서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 이 주제를 놓고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간단히 처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만약 위대한 지식인 중에 복음을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 입증된다면, 여러분의 주장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탁월한 지성을 지닌 이들도 복음을 믿었다는 분명한 사실은 이 같은 현대인들의 생각에 즉각 의구심을 품게 만듭니다.

 

둘째로, 처음에는 복음을 극렬하게 반대했다가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 그런 사람들은 성경에도 일부 등장하며 그 후의 역사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 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복음을 무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복음이 전적으로 틀렸음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전에는 기독교를 반대했다가 나중에 믿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까? 그들이 뇌종양을 앓았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맥경화나 그 밖의 원인으로 뇌가 퇴화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비교적 젊었을 때 이런 변화를 겪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머리가 이전과 똑같이 명석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풍성히 제공해 주었습니다. 처음에 복음을 반대했던 사람이 똑같은 두뇌를 가지고 나중에 믿게 되어 변화의 이유를 완전히 밝힐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반증임이 틀림없습니다.

 

셋째로, 아주 흡사한 재능을 타고난 두 형제가 함께 자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똑같이 공부를 잘하여 수석의 영예를 누리다가 같은 대학에 진학해서 거의 똑같이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는데도,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한사람은 불신자로 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지성의 문제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데 모두 동의 할테니 말입니다. 이 또한 똑똑한 현대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 될 리가 없다는 주장을 영원히 철회시키기에 충분한 근거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그 점은 받아들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지식의문제가 아닐까요?" 일반인들, 심지어 주교들까지 과학지식의 증가로 20세기에는 옛날처럼 신앙을 갖기 힘들다는 주장을 책에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과거에 몰랐던 일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현대지식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믿지 못했겠습니까? 그들도 현대인들과 똑같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신앙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불신앙은 지식의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과거에는 전부 복음을 믿었고 원자 분할이 가능해진 이후에야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야 완벽한 주장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현재 못지않은 불신앙의 사례들이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새로운 지식을 보십시오.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저는 지식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대지식, 현대의 발견과 발명 자체를 반대할 바보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같은 지식의 증가가 우리의 주제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입니다. 인간은 원자를 분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무엇을 더 알려 줍니까? 러시아인들이 달에 탐사선을 착륙시킨 사건 - 이것은 놀라운 업적이니 만큼 그 공로는 인정하기로 합시다. - 이 일주일 전에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 죄를 어젯밤 또 다시 저지르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줍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을 줍니까? 이 모든 지식의 증가가 인간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해 줍니까? 인간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지금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해줍니까? 어떻게 깨끗하고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또는 죽음 이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조드럴 뱅크(Jodrell Bank)전파 천문대로는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도 인간의 영혼이나 하나님에 대해, 인생의 중대하고 근본적인 사안들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줄 수 없습니다. 현대지식은 이런 질문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상은 불신앙의 부정적 측면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앙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답이 여기 나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 - 이 말을 '분개'(indignation)보다는 ''(anger) '질투'(jealousy)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계속 있습니다. -"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이제야 진상이 파악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과연 차분하고 냉정하며 과학적이고 편견 없는 관찰자의 모습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 관찰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도 약간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고, 저도 2년간 과학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제껏 다른 곳에서 보아 온 편견 못지않게 많은 편견이 과학계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학자들은 공평무사한 사람들로서 서로 질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의나 원한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과학자들에게 밝혔을 때 과연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그 부분에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불신앙의 원인은 인간의 추론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불합리성에서 비롯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듯이, 또 사람들이주님을 대우한 방식에도 명백히 드러나듯이, 불신앙은 전적으로 감정과 편견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24절을 봅시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지도자들은 성전 미문 앞에 있던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인 사도들이 지각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성경을 해설하는 말도 들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비상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진정으로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과학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니,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이 발생했는데, 이 사람들 혼자 힘으로 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틀림없이 다른 힘이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어디 한번 지켜보자. 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지켜보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대하고도 정정당당한 태도로 겸손하게 조사하거나 사도들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그 사건들을 그냥 무시해버렸습니다. 분노 섞인 질투와 불쾌감과 분개심에 가득 차서 사도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전면 금지시키려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관대한지 보십시오. 그들은 도덕적인 도착행위를 눈감아줄 뿐 아니라 기꺼이 합법화시켜 줄 정도로 관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과거에는 격앙된 감정으로 이런 행동을 심판했습니다.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했고, 일정한 행위들을 마땅히 벌해야 할 도착행위로 치부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태도에서 벗어날 정도로 성숙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진정 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이런 행위들을 바라볼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법칙 자체를 깨뜨리는 일들을 기꺼이 용인합니다. 이런 도착에 빠진 이들에 대해서는 저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원칙의 문제를 다루는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그런 사람들을 칭송하거나 그들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장 나쁜 태도입니다. 그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도착행위나 더러운 행위까지 용인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대인들이 복음은 용인하지 않으려 듭니다. 이 관대한 신사들이 복음에 대해 하는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라디오를 들으면서 여담에 묻어 나오는 비웃음과 경멸과 적의를 느껴 보십시오. 정정당당한 태도나 조금이라도 여지를 주려는 태도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만불손한 조롱으로 표현되는 전적인 거부만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으로서, 여기 그 대답이 나옵니다.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5:17,24).

 

이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대답하기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모두 불신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불신앙의 죄에 빠졌던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은 질투와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었고, 사두개인이었고, 산헤드린의 주도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력인사들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식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에 자부심을 느꼈으며, 백성들이 항상 자신들의 말을 듣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배움 없는 자들이 무대중앙을 차지해 버린데다가 군중이 그들을 따르며 열심히 듣는 광경까지 보게 되니 화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 삽비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기적은 환심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지위, 높은 지위뿐이었습니다.

 

저는 사두개인들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특히 사두개파를 강조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십시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물론 사두개인들의 진짜 문제는 초자연적인 일들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던 탓에 부활 따위는 일어날 수 없다고 늘 가르쳐 온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이 처한 곤경이 보입니까? 초자연적인 일들을 일으키는 사도들, 나사렛 예수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노라 주장하는 사도들이 지금 자기들 앞에 서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를 정죄하여 사형시키는 데 성공했고, 예수는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가 다시 살아나 하늘에서부터 능력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사두개인들에게 더 큰 굴욕감을 안겨 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근 다음 보초까지 세워 지키게 한 첫날밤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고 죄수들을 풀어 준 것입니다. 천사의 존재도 입증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며 천사 따위도 없다고 늘 말해 왔고, 그 말을 사람들도 믿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면 분명 입장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지위 전체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거창하게 의식을 갖추어 "죄수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는데, 옥에 갔던 군사들이 돌아와 옥도 그대로 있고 옥문도 닫혀 있고 보초들도 그대로 있는데 죄수들은 사라졌다고 보고한다면, 그야말로 난처할 것입니다.

 

이것은 1세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얼마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하나님은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기적도 있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무식한 바보가 똑똑한 자기들보다 나은 삶을 살면서, 자기들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설명 불가능한 일까지 해냅니다. 현대인들은 곤란해집니다. 그들의 입장 전체, 지위 전체가 위협당합니다. 사람들이 등을 돌립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진짜 원인이며 요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지적인 평판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실은 마음속에서 이런 고민이 벌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 잘 교육받은 유식하고 세련되며 과학적인 현대인의 정신적 틀 전체가 무가치하게 떨어져 부서집니다. 이것은 당연히 무서운 일이며, 사람들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 속에 담긴 미움과 분노의 요소가 보입니까? "시기가 가득"한 것이 보입니까?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와 똑같은 분노를 목격합니다. 사람들은 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하지 못할까요? 왜 합리적으로 글을 쓰지 못할까요? 왜 항상 조롱하고 비아냥거릴까요? 왜 그토록 화를 낼까요? 왜 그토록 흥분할까요? 지금 저는 꾸며 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저만큼 이런 반응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저만큼 잘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복음을 조롱하는 것을 현명한 일로 생각합니까?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아들을 그런 식으로 대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왜 아직도 그처럼 짓밟혀야 하며, 그가 표상하는 모든 것과 그가 와서 행하신 모든 일 또한 그렇게 짓밟혀야 합니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왜 아직도 미음을 받아야 합니까?

 

성경은 제자들이 공동감옥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1세기에는 여러 종류의 감옥이 있었습니다. 공동감옥은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극악하고 더러운 죄를 지은 자들과 중죄인들이 거기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이 자들은 명백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소. 이들은 주정뱅이도, 살인자도 아니오. 적어도 더 자세한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좀더 나은 감옥에 가두어 둡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동감옥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태도이며, 불신앙에 언제나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불신앙은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동감옥에 던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두 강도들 틈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차분하고 합리적이고 냉정하며 과학적으로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여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감정과 격정의 외침뿐입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권위와 무력을 동원했다는 점과 사도들을 침묵시키려 했던 점, 사실상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 역시 불신앙에 언제나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저는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통해 이 점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성도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찾아볼 때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십시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십시오. 1-2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고 학대했으며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또 중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런던과 그 밖의 곳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스코틀랜드의 서약파들과 청교도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초기 감리교도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십시오. 17세기 이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이유 삼아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으며 양쪽 귀를 잘라냈습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잔인하게 행동하는 이이가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 불신앙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처럼 계속적으로 격정에 휘말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눈에도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지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차분히 진리를 바라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질투에 찬 분노와 미움, 맹렬한 악의와 원한에 찬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데요." 정말 그렇습니까? 오늘날에는 박해가 없습니까? 전에 우연히 이 부분을 알아볼 만한 자리에 있었는데, 슬프게도 오늘날 역시 심각한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때로 교육계 고위직을 잃을 위험에 처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부문, 모든 활동영역에서 제지를 당합니다. 박해의 예는 신문이나 잡지논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이유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애쓴다는 이유로 비웃음과 야유를 보냅니다. 오히려 성도착자가 되면 칭송을 받습니다. 이 멋진 사랑에는 무언가 신기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덤벼들며, 서로 눈을 찡긋거리면서 수군대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억압합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과학적인 관찰자들과 연구자들이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헛소리는 듣지도 마십시오! 불신앙의 원인은 여전히 시기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입니다. 불신앙은 기독교처럼 좋은 것을 반대함으로써 스스로 그 불합리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은 무엇을 거부했습니까? 성경은 천사가 사도들에게 나타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도 적들이 격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보다 더 이해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불신앙이 불합리하다는 데 동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사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자신을 한 번 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지도자들이 거부한 대상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눈물이나 빼는 이야기였습니까? 그런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원시적이고 저급한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 반하며 인간의 최대 유익에 반하는 이야기를 거부했습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이 인간의 지성을 속박하는 것,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로운 것이었습니까?

 

그에 대한 답변이 여기 있습니다.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입니다(3:16). 세상과 우리 모든 사람을 만드신 크신 하나님, 만유 위에 계시며 영원한 재판장 되신 하나님이 자신을 거역하여 죄를 지은 인간, 자신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 인간을 해방할 방법 - 구원의 방법 -을 계획하셨다는 바로 그 메시지를 사람들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2:11). 그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만약 복음이 '하나님은 우리를 덮쳐서 짓뭉갤 기회만 기다리는 거대한 폭군으로서, 언제나 우리를 억압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정신과 영과 혼을 망쳐 놓고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와 정반대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법전을 들이밀면서 "이것을 지키면 용서해 주겠지만, 지키지 못하면 지옥에 던져 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는 실패하고 죄를 지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신자들이 어떻게 이런 메시지를 거부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들이 누구에게 침을 뱉는지 보십시오. 누구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들려주는지 보십시오. 이 사람을 조롱하고 야유하며 문자 그대로 침을 뱉는 자들,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롱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이 대체 누구기에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은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세상에 등장한 인물 중에 가장 놀라운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10:38). 여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당대에 가장 훌륭하고 명성이 드높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옷자락을 들고 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이들과 한자리에 앉아같이 먹으며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불쌍한 창녀가 눈물로 자신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도록 허용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에게 인자한 말을 했던 이가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자들을 격려해 주었던 이가 있습니다. 그를 보십시오. 그는 병든 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들을 온전케 해주었고, 눈먼 자와 저는 자와 귀먹은 자들을 고쳐 주었으며, 죽은 자를 살려 주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바로 이런 인물에게 침을 뱉었던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들어 보십시오. 어느 날, 그가 하는 말을 들은 하속들은"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7:46). 다른 사람들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은혜로운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의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곳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산상설교를 그대로 실천하기만 한다면, 산업문제도, 사회문제도, 도덕의 문제도, 국제간의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런 인물을 못박았으며, 이런 인물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는 십자가를 회피하고 모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본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19:10). 그는 가장 큰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였기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크나큰 연민과 사랑의 마음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해 주기위해,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속박과 구속에서 구해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죽으려고, 장사되려고, 부활하려고, 성령을 보내 주려고 그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묻겠습니다. 이런 분을 반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일입니까? 이런 분을 향해 이를 가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일입니까? 그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자들, 그가 누구시며 세상에 왜 오셨는지 ,무엇을 주려 하시는지 알려 주는 자들을 옥에 가두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일입니까?

 

천사는 말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생명! 만약 주님께서 일종의 노예생활을 제시하셨다면 반대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저는 기독교를 노예생활로 여기는 이들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라. 그리스도인이 되면 반쪽짜리 인간밖에 못되는 거야. 기독교는 곧 억압을 의미하니까. 기독교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성애든지 동성애든지 상관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사실은 둘 다 옳은 건데 말이야"라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지금 이대로 밀고 나가. 기독교에서 하는 말은 듣지 말라고. 그 말을 들으면 갑갑하고 제한된 삶을 살게 된다니까. 경이롭고 행복한 것들은 전부 놓쳐 버리고 별볼일 없는 인간이 되어 별 볼일 없는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 끝날 거야." 이것은 전부 마귀의 말로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말에 솔깃할 만큼 무모하다는 뜻입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기독교가 전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야말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으로서, 세상은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술을 마신다고 생명이 얻어집니까? 술은 오히려 사람을 노예로 만들며, 심신이 최상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을 뿐 아니라 머리를 마비시키고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파악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취한다고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여기, 사도들이 전한 이 메시지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전 인격을 구원해 주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인류보다 크고 세상보다 큰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 죽음을 넘어 영원한 세계까지 뻗쳐 있는 진리입니다. 여기에 만물을 설명해 주는 위대한 세계관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만물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메시지는 지적인 삶을 살게 해줄 뿐 아니라 새로운 도덕적 본성을 주며,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감사를 줍니다.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과 기쁨과 활력과 열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삶은 여러분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삶입니다. 여러분을 불구로 만드는 삶이며, 난파된 상태 그대로, 빈껍데기상태 그대로 방치해 두는 삶입니다. 생명은 오직 여기에만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되어 성장하며 확장되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양 불쾌해 하고 화를 내면서그토록 신랄하게 조롱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거듭날 수 있으며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새로운 삶의 원리에 따라 살 수 있다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부터 능력, 곧 여러분을 해방시켜 줄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지성이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까? 인간의 지성은 술 취하지 않도록 돕지 못하며 , 결혼서약을 충실히 지키도록 돕지 못합니다. 성도착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지 못합니다. 절대 그렇게 해주지 못합니다. 지성은 다소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도와줄 수 있을 뿐, 어떤 면에서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에는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 그것도 격렬하게 거부하는 것은 심히 불합리한 일입니다.

불신앙이 보여주는 불합리성의 마지막 증거는 이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힘으로 사도들의 설교와 치유사역을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가 개입되는 것, 이 복된 말이 개입되는 것, 하나님과 그 능력이 개입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당국자들에게 도전하라, 그들이 금하는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는 이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인물을 거부하고,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가르침을 거부하며, 생명을 거부하고, 영생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전할 만큼 무모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지식의 힘과 권력의 힘과 과학의 힘과 20세기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감옥 문을 걸어 버립니다. 이 메시지를 끝장내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좀더 잘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17절 서두에 나오는 "그때에"라는 말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들이 언제 이런 짓을 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직후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런 기적들이 일어났는데 도 어째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사람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대적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반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중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이 보여주는 마지막 불합리성이자 무모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복음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설교자인 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한 사건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옥문을 걸고 보초를 세워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풀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교회 역사 전체의 개요이기도 합니다. 1세기에 살았던 똑똑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도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그들은 칼과 화형대로, 교수형을 비롯한 물리적 수단으로, 또한 지적인 방식으로 이 도를 멸절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전부 허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도를 영영히 굳게 하셨습니다.

 

마귀는 마지막 숨겨 둔 무기를 꺼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땅에 묻은 후에 드디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입니다. 인간들과 마귀와 지옥은 지금도 기독교를 끝장내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하며 영영히 가두어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옥문은 언제나 열릴 것이며, 그들이 죽여 없앴다고 여긴 복음의 사자들은 우뚝 서서 세상을 향해 말할 것이고, 그 백성들과 복음은 많은 이들을 구원과 생명으로 이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죄가 보여주는 불합리성은, 그것이 인간이나 인간의 가르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 주님은 다음과 같이 행하실 것입니다.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 나라 왕성하리라.

아이작 왓츠(Isaac Watts)

 

, 청컨대 자신의 불합리성을 보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또한 믿는 자는 이 구원뿐 아니라 생명 , 더 풍성한 생명까지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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